현재 서울에 역사로서 남아있는 건축물들(독립문, 독립관)
현재 서울에 역사로서 남아있는 건축물들(독립문, 독립관)
이런 것들은 굉장히 어떻게 보면 편의적으로 어떤 것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부정적으로 해석돼서 없어진 반면에, 또 어떤 부분들은 충분히 근대적인 건축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서 남겨져 있는 것이죠.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얘기해볼 수 있는 것이 서대문 형무소, 지금 서대문 역사공원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 수도 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과거 경성 교도소 처음에 역사가 시작이 되는데, 무수히 많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고초를 겪고 극형을 당하기도 했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그랬던 장소였죠. 그래서 일반적으로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가 그런 독립투사들이 많은 고초를 당한 장소로 기억이 되고 기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이 공간은 해방 이후에는 오래된 우리 군부 독재의 역사 속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던 곳이기도 하고요. 또 사실 기본적으로 모든 감옥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그런 정치범 이외에 일반적인 잡범들이 많이 들락거리던 곳이기도 하죠. 그러다가 이 공간이 서울이 대도 시화되는 과정에서 결국 지금은 서울구치소로 활용이 되다가 지금은 의왕 쪽으로 옮겨가면서 거기가 비게 되고, 아마 그 공간이 87년에 그 구치소가 서울시 외곽으로 이전이 되는데, 그러면서 그 지역을 아파트로 개발을 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하면서 조선총독부 해체와 동시에 서대문 형무소 일대를 역사 공원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거기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기념 공원으로 남게 되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서대문 형무소와 같이 독립문을 연결해서 독립공원으로 조성을 하게 되는데, 사실 독립문이라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이 상식적으로는 이게 조선의 독립을, 항일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기념 건축물로 생각을 하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거든요.
독립문의 역사
독립문은 아시다시피 1897년에 독립협회가 만들어지면서 상징 건물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해서 만들었는데 그거를 조금 축소한 사이즈로 만들었는데요. 이 독립문이 그 당시에 만들어진 취지는 사실은 그 직전에 있었던,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의 결과물로 조선이 청나라에 과거에는 형식적이지만 제후국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청으로부터 독립한 나라가 되었다는, 근대적인 독립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해서 세운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은 반일의 뜻을 담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당시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의 싸움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이고, 그 결과로 우리가 청나라에 형식적인 전통적인 복속 국가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기념하는 의미를 띠게 되고요. 실제로 나중에 독립문을 건설한 독립협회의 상당수 인사들은 처음에는 대한제국과 고조를 같이 해서 고종이 지원을 많이 해주면서 독립협회가 성장합니다만, 나중에는 독립협회가 대한제국과 갈등을 겪으면서 고종황제에 의해서 강제로 해산을 당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중에 독립협회를 주도했던 일부 인사들이 친일파가 되면서 일진회를 조직을 해서 오히려 일본에 한국 강제병합을 찬성하고 동조하는 그런 입장까지 나오거든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독립문을 없애지를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경복궁의 전각을 다 철거하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독립문이 반일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면 당연히 철거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오히려 독립문이 나중에 1920년 중반이 되면 낡아서 무너지려고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오히려 일본 당국에서 보수공사까지 해서 남겨놓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독립문이라는 것을 마치 바로 옆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와 엮어서 같은 맥락에서 조선의 항일 독립의 의미를 담은 공간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그것이 세워진 역사적 맥락이나 일제강점기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 하는 것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독립관의 역사
독립문 그다음에 그 옆에 같이 세워진 독립관이 있는데, 독립문과 독립관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조선시대에는 청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과 모화관이 있었던 자리죠. 그래서 이 자리가 우리 민족에게는 오랜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세웠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청나라와 맺는 관계에서의 문제고요. 사실 이 독립문이라는 것은 일본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것은 일본인의 관점에서 보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의미를 기념하는 문이기 때문에 이것은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승리를 기념하는 전쟁기념물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일본인들이 이것을 계속 보수공사까지 하면서 남겨놓았던 거고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 독립문에 내포되어 있는 이런 의미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죠. 어떻게 보면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상당히 필요에 따라서 기억이 편취적으로 선택과 배제가 되고, 그래서 어떤 것은 망각되고, 어떤 것은 다소 과대하게 기억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