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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의 지리와 역사

홀앱 2022. 7. 27. 11:48

조선시대 서울의 지리와 역사

조선시대 서울의 지리와 역사
조선시대 서울의 지리와 역사

조선시대 도읍이었던 한성부, 한양 4대 문 안 지역에 남겨져 있는 도시의 기억 혹은 도시의 유산에 대해서 오늘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장의 지도에서부터 먼저 여러분 설명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17세기에 김수홍이라는 사람이 그린 '조선 팔도 고금 총람도'라는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보시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한반도의 지도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지도가 일그러져 있다고 생각을 하실 텐데요. 당연히 우선 눈에 띠는 것이 북한 지역에 남한 지역에 비해서 현저하게 도시가 왜곡되어 있고, 작게 그려져 있다고 생각이 되실 겁니다.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농경시대 사람들의 눈에는 이게 훨씬 더 정확한 지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실측 지도는 전혀 아닙니다. 농경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고 또 그래서 얼마나 많은 인구가 거기에서 살고 있는가? 라는 것이 실제로 그 지역을 바라보는 제일 중요한 관점이었다고 볼 수 있고요. 그랬을 때 북한 지역은 실제로 그 당시에 농업 경작이나 인구 규모 면에서 남쪽 지역, 삼남 지역보다 훨씬 더 적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인식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죠. 국토의 중요성 면에서 그렇게 인식했다고 볼 수가 있고요. 또 하나 우리가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게 한양, 서울 지역이 크기도 굉장히 왜곡돼서 엄청나게 크게 그려져 있고, 위치도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게 아니라 한반도의 한가운데로 옮겨져 있습니다. 이런 위치나 크기에서의 왜곡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사실은 당시에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서울이 차지하는 위상을 어떻게 보고 있었던가를 그대로 웅변해주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지지도로서 그 당시의 사람들의 'Cognitive Map'이라고 얘기하는데요. 서울을 혹은 한반도라는 영토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19세기 김정호의 지도에서 서울 지리

19세기 김정호가 그린 서울에 대한 지도입니다. 김정호는 잘 아시다시피 최초로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실측한 지도를 그린 인물로 알려져 있죠. 그렇지만 이게 오늘날 우리가 보는 관점과는 굉장히 다르게 당시에 지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종의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도를, 지형을 이렇게 읽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요. 풍수적인 관점입니다. 이 지도에서 오늘날 우리가 그리는 지형도와 가장 큰 차이를 보자면 오늘날 우리는 지형도를 그릴 때 등고선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죠. 그러니까 같은 높이의 지점들을 연결함으로써 가장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 간의 표현을 등고선을 통해서 표현을 합니다. 그런 데 반해서 이 지도는 전혀 그런 방법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산줄기가 꿈틀거리면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흔히 백두대간을 통해서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다.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어서 남북까지 모든 지형이 형성된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요. 그런 일종의 산줄기를 통해서 어떻게 지형이 쭉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은 북한산에서 비롯된 산줄기가 어떻게, 그리고 관악산에서 비롯된 산줄기가 어떻게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가? 그 사이에 물길로서 한강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김정호의 지도가 서울 일대의 지형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풍수사상에서 이것을 소위 지형을 읽는 방법을 간룡 법이라고 하죠. '볼 간' 자, '용 용' 자 써서.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일종의 산의 산세가 흘러내려오는 것을 '지기가 흐른다. '라고 하고, 그게 일종이 용이 꿈틀거리는 것을 읽어내는 것으로 보는 거죠. 그래서 지기가 흘러내려서 어디에서 분출하는가? 그래서 그 지기가 분출하는 곳이, 발복 하는 곳이 거기가 명당자리다. 이렇게 보는 것이 풍수상에서의 지형을 읽는 방법인데, 일종의 그런 세계관이 투영된 지형을 읽는 눈을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풍수사상으로 보는 서울의 모습

우리가 일반적으로 풍수라는 게 근대화되는 과정에서는 일종의 미신으로 간주되어서 주로 묏자리 잘 써서 후세에게 발복하는 그런 사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풍수는 원래 양택풍수와 음택풍수 2가지로 나뉘고요. 주로 묏자리 쓰는 거는 음택풍수고, 실제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을 선택하는 방법이 양택풍수인데, 우리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사실 풍수사상이 미신 취급당하면서 주로 음택풍수로만 많이 전해 내려온 측면이 있죠.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도읍의 자리를 정한다든지 이럴 때는 양택풍수적인 관점이 크게 중요하게 작용을 했다는 것을 김정호의 지도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형도에 나와 있는 것이 어쨌거나 서울을 둘러싼, 크게 보면 외사산이 있고, 그다음에 외사산 안에 또 내사산이 있어서 아주 넓게는 외사산이라는 지역, 그래서 북한산을 중심으로 해서 남쪽에는 관악산이 있고, 동쪽에는 용마산이 있고, 서쪽에는 덕양산이 있고, 이렇게 외사산을 잇는 큰 면적이 오늘날 서울을 둘러싼 경계. 사실 이게 오늘날 서울특별시의 면적 경계, 대략 600㎢ 이상의 면적을 차지하는데요. 이 지역이 그래서 오늘날의 경계와 대체로 천만 인구를 수용하는 도시의 면적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고. 한성부를 지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 안에 있는 내사산에 해당하는 지역이죠. 북악산 혹은 백악산이라고 불리는 산, 그다음에 남쪽에는 남산, 목멱산, 그리고 동서쪽으로 동쪽에 낙산 혹은 타락산, 그다음에 서쪽에 인왕산 이렇게 둘러싸고 있는 산 능선 따라서 성곽을 지은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한성부의 성곽을 구성하고 있는 성내 지역을 구성하는 4대 문 안 지역의 경계가 된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김정호의 지도상으로 보면 분명히 왜곡이 있는 부분들은, 그 이후에 더 심한 왜곡들은 사실 많죠. 조선시대에 그려진 서울의 지도들을 보면 한양의 지도들은 거의 다 성내 지역을 아주 크게 그린 반면에 성 외부 성저십리 지역들은 아주 축소시켜서 그린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또 성내 지역을, 사실은 우리가 남대문이라고 불리는 숭례문이 정남향이 아니죠. 상당 부분 서남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소 왜곡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기하학적으로 정방향으로 서울의 4대 문 안의 구조를 다소 왜곡해서 인식하고 있는 부분들은 있습니다.

19세기에 생각했던 서울의 모습

그런 것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서울의 지리를 생각한 부분, 인식하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풍수적인 요소, 그다음에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한강의 수운을 이용한 한반도 전체 교통의 결절점으로써 서울이라는 입지조건이 결정이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고요. 그다음에 아시다시피 조선왕조라는 것은 성리학 유교적인 질서를 도시 곳곳에 사실 상징적인 장치로서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서남북, 우리가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만, 원래 명칭이라는 것이 동대문은 흥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 이렇죠. 그리고 북쪽에 숙청문이 있었고, 가운데 보신각이 있죠. 그래서 이런 것들이 그 이름 자체 하나, 하나가 유교적인 덕목인 인, 의, 예, 지, 신을 사실 각 방위의 결절점에 새기고 있어서 일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의 산물로서 군자들이 사는 유토피아의 꿈을 구현한 이상향적 공간으로 조선왕조가 수도를 설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유교적 우주론으로서 사실 중세 행정도시 한양이 만들어졌는데, 아시다시피 이런 유토피아가 그대로 구현될 수는 없는 거고요. 특히 이게 전란을 겪으면서, 임진왜란, 호란을 겪으면서 크게 파괴가 되죠. 그러면서 조선후기에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