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29. 06:39ㆍ조선, 개항기, 서울 역사, 지리
일제강점기의 건축물들의 청산하는 서울 모습
우리는 일제시기라는 역사, 적어도 1910년부터 45년 혹은 좀 더 길게 잡으면 1905년부터 혹은 개항기부터의 역사로 잡아볼 수 있는 일본 혹은 일본인들이 서울에 들어와서 남긴 흔적들에 대해서 우리는 가급적 기억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편리한 방식으로 사실 기억을 남기고 있습니다. 예컨대, 일제시기에 일본이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부를 일제의 식민지 조선의 중심 도시인, 권력 거점지인, 즉 경성부로 바꾸면서 아주 상징적인 새로운 형태의 도시 변모를 하죠. 왕조 수도로 꾸며져 있던 도시 공간을 식민지 수도 도시 공간으로 정말 재편하는 작업을 하는데요. 거기에서 상징적인 건물로 세워졌던 것이 경복궁에 세워졌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고, 또 남산 위에 있었던 조선신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5년에 광복 50주년을 맞아서 당시 문민정부에서 광복절 날 이것을 해체식을 했죠.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 경복궁의 복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맞은편에 있던 조선신궁은 어떻게 됐을까요? 조선신궁은 아시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사실 기억 자체는 안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산식물원 자리에 있었는데요. 남산 중턱에. 그 건물은 사실은 조선총독부와 조선신궁은 하나의 세트로서 같이 만들어졌고요. 일제의 어떻게 보면 식민지 거점 도시로서 경성부를 만드는 데 있어서 이 두 면은 서로 대응하는, 대칭하는 관계로 만들어져서, 그래서 사실은 경복궁이 원래 서 있던 축과 그 이후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거기에서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축 선은 약간 각도를 달리하는데요. 조선총독부가 조선신궁을 겨냥해서 축을 맞추었음을 우리가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실은 조선신궁이 그래서 없어진 것은 일제가 1945년 8월 15일에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고 난 직후에 경성에 있던 일본인들이 일본 본토로 건너가기 직전에 사실은 자신들 손으로 직접 해체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일본인들이 남긴 신사들이 조선 각지에, 각 도시마다, 혹은 각 지역마다 있었는데요. 굉장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 상당수가 특히 일제 말기에 신사 참배라는 것을 천황제 제국 일본에 대해서 조선인들의 충성을 맹세하게 하면서 신사 참배를 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굉장히 조선인들이 그것에 대해서 반감이 있었습니다.
일제 잔재 청산한 서울의 모습
일본 신또의 신에 대해서 우리가 머리를 조아리고 천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이런 것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감이 컸기 때문에, 해방 직후에 사실 일본인들의 참배의 대상이었던 신사들은 조선인들의 손에 의해서 대부분 다 파괴가 되었습니다. 불살라진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경성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철수하기 전에 조선신궁을 직접 다 해체하고 일본으로 떠났거든요. 조선신궁은 형체가 없어졌고, 사실은 그 자리에 나중에 이승만 정권기에는 이승만 동상이 서기도 했고요. 또 국회의사당을 처음에는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 중턱에 지으려는 구상도 이승만 정권 때는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서 거기에 다른 건물이 처음에는 어린이회관으로 바뀌어서 들어섰고, 또 지금은 안중근 기념관이 그 앞에 위치되어 있기도 한데요. 그런 변화를 겪었던 것이 조선신궁이고, 또 우리가 그래서 경복궁의 조선총독부는 95년도에 해체가 되었고, 그 해체라는 것은 결국 어떻게 보면 사실은 그 건물은 줄곧 중앙청으로 쭉 사용이 되죠. 그러니까 해방 이후에도 똑같이 정치, 행정 권력의 중심 건물로 쓰여 왔고, 80년대에 접어들어서 과천으로 일부 이전이 되고 하면서 중앙청 건물이 박물관으로 쓰였었는데요. 그래서 이게 문민정부로의 변화라는 거를 일종의 상징하는 이벤트로서 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그것을 해체하는 작업을 했는데요. 그것은 사실 일제시기에 조선총독부라는 것이 1910년부터 45년까지 35년간 통치하면서 총 10명의 총독이 부임을 했었는데, 조선총독 10명이 전부 다 공통점이 군사령관이었거든요. 9명은 육관 사령관이고, 단 1명이 해군사령관이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이후에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 노태우까지 이어지는 정부 정권의 최고 수반이 다 군 출신이었다는 의미에서 식민지부터 계속되었던 군부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등장했다는 상징을 그런 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라는 데서 찾고 싶었던 것으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현재 일재 청산한 자리들의 모습
지금 그 박물관이 해체된 이후로는 용산에 새로 국립박물관이 옮겨져서 크게 지어졌습니다만, 그전까지는 박물관으로 또 쓰이기도 했던 건물이었죠. 그래서 조선신궁은 해방 직후에 없어졌고, 조선총독부 건물은 문민정부의 탄생과 함께 민주화의 상징으로서 없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은 똑같은 맥락에서 그 건물이 다 같이 1925년, 26년에 지어졌는데요. 거의 같은 시기에 사실은 지금의 서울역도 25년에 만들어졌고, 그다음에 경성부청사도 2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서울시 도서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죠. 그렇게 본다면 사실 이 모든 것들이 그 당시에 식민지 권력을 상징하는 상징 건축으로 같이 준비가 되었었거든요. 그래서 경성역이라는 것이 그때 25년도에 크게 만들어지면서 경성역 개장 이후에 첫 번째 열차에 실려서 들어온 것이 조선신궁에 모실 신의를 일본에서 갖고 온 것이었는데요. 그와 같은 공간으로 같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조선신궁이나 조선총독부는 해체되었지만, 경성부청이나 서울역은 근대의 기념 건축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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