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28. 19:33ㆍ조선, 개항기, 서울 역사, 지리
서양인들이 본 개방 전 중국, 일본, 한국

서양 사람들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을 은자의 나라(The hermit nation)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혹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요. 이런 표현 자체가 사실은 이미 의미하는 바가 있는 거죠. 은자의 나라라는 것은 잘 드러나지 않은 나라였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 우리 한반도에 바로 이웃해 있는 중국이나 일본은 상대적으로 서양에 아주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던 반면에 당시 꼬레아라고 불린 조선은 상대적으로 조선 이전에는 국제적으로 좀 잘 알려져 있었던 나라죠. 신라 때는 처용가 이런 거 통해서 알다시피 아랍 사람인들도 꽤 많이 왔던 것 같고요. 인도와도 거리가 있었고 이런 게 있었는데 그리고 고려 시대에도 비교적 국제적인 무역이나 이런 것이 완성했던 반면에 조선 시대 들어와서는 상당히 성리학이라는 것이 산업적인 교역까지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굉장히 농업 중심적인 안정된 성리학적인 질서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외부 세계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소극적이죠. 그 여파가 이어져서 그게 특히 조선 후기에는 더 심해져서 굉장히 강한 쇄국정책으로까지 한말에 이어지게 되고 그게 우리나라의 개항을 늦춤으로 인해서 사실 근대로의 전환이 있어서는 이제 주변의 다른 나라들보다 우리가 굉장히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아편전쟁과 서구문물
사실 동아시아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1840년에 일어난 아편 전쟁에서부터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되죠. 그러면 아편 전쟁이라는 게 결국 그 이전에 동양을 지배하고 있었던 중화제국이라고 불렸던 중국이 청나라가 굉장히 치욕적인 형태의 개항을 하게 되죠. 그래서 서양에게 부분적으로 치외법권을 허용하면서 주권을 내주는 형태로 개항이 이루어져서 일종의 동양을 석권한 제국이 됩니다. 또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제국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서양 열강에 난도질당하는 반식민지, 굉장히 분할된 땅덩어리로 전락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요. 일본은 사실 서양 열강들이 직접적인 관심을 가졌던 나라는 상대적으로 아니었고요. 중국의 땅덩어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거기에 관심이 많이 몰렸었습니다.
미국으로 인해 개방된 일본
서양 열강 중에서는 사실 가장 늦게 제국주의 반열에 합류했던 미국이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일본의 개항을 페리 제독이 일본 사람들은 구로후네라고 하는 흑선 대포를 쏘면서 아편 전쟁을 목도하고 서양 열강의 힘이 강한 데 대해서 일본인들이 상당히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미국이 개항을 요구하면서 미국과 개항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일본이 개항을 하게 되는데 우리나라도 사실 비슷한 시기부터 개항 요구는 받게 됩니다만 굉장히 강하게 저항을 했고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서양 열강과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이런 형태를 통해서 쇄국정책 과정에서 몇 차례 개항을 요구하는 서양 세력들과 군사적인 마찰까지 있었지만 결국 허용하지 않았다가 강화도조약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개항을 하게 되죠. 그래서 그 결과로 처음에는 우리가 일본과 개항 조약을 맺고 그다음에는 차례차례로 다른 여러 서양 나라들과 조약을 맺으면서 서양인들이 한국에 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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