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과 함께 바뀐 조선 후기 한양의 모습

2022. 7. 27. 21:38조선, 개항기, 서울 역사, 지리

전란과 함께 바뀐 조선 후기 한양의 모습

전란과 함께 바뀐 조선 후기 한양의 모습
전란과 함께 바뀐 조선 후기 한양의 모습

조선 후기에 임진, 정유, 병자, 정묘라는 도합 44년에 걸친 큰 전란을 겪으면서, 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집중적인 전란을 겪게 되고요. 이것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사실 우리가 이거를 경계로 해서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를 나누는데, 사회가 크게 바뀌죠. 조선 전기 사회와 후기 사회의 성격이 굉장히 크게 바뀌는데, 이거는 단순히 조선만 문제는 아니고요. 사실은 동아시아 전체가 크게 변하게 됩니다. 이게 전쟁은 한반도를 무대로 해서 일어났지만 그래서 가장 큰 피해는 우리가 입었습니다만, 사실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침략을 해왔고, 이게 아시다시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것은 한반도의 길을 빌려서 결국은 중국을 침략하겠다는 의도를 내세우면서 일으킨 전쟁이었고, 사실 그게 허언은 아니거든요.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의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왔었고, 그 정도의 병력이면 사실 명나라도 그것을 우리가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해서 한반도로 왔습니다만, 명나라 입장에서도 순망치한이라고 해서 그대로 두면 당연히 일본군이 중국 본토까지 쳐들어올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전란을 미리 자기들 영토로 들어오기 전에 막겠다는 의도에서 조선으로 파병을 한 것이기 때문에요. 그리고 명나라도 사실 전력을 다해서 전쟁을 치렀던 것이죠. 이 전쟁의 결과로 사실은 일본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결국 전쟁 과정에서 병사를 하고, 결국 그 뒤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쿠가와막부(도쿠가와 바쿠)를 건설하면서 그 뒤에 일본이 일종의 새로운 평화의 시기를 맞게 되죠, 그 이전에 전국시대를 끝내고. 그리고 명나라 같은 경우도 중국이 그 전쟁의 여파로 명나라가 굉장히 위기를 맞게 되고, 이어서 만주에서 발원한 만주국이 청나라를 세워서 천하통일을 하면서 다시 청나라의 시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명청 교체기가 바로 이 시기이고, 일본에서도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를 거쳐서 도쿠가와막부라는 시대가 새롭게 열리게 되는 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사실 그렇게 본다면 조선에서만 유일하게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서만 조선왕조가 계속 이어진 것이죠. 그래서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는 같은 왕조로 이어지긴 하지만 사실 굉장히 큰 사회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우선 한반도가 전역이 전쟁의 여파로 피폐화가 되었는데요. 그래서 조선왕조가 다시 재건되는 과정은 크게 보면 2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전쟁 이후 조선왕조 재건 과정

하나는 경제적 피해를 복구해야 되는 거고, 다른 하나는 무너진 사회적 기강을 확립해야 되는 것인데요. 이 과정에서 이양법, 견종법, 고구마, 감자, 고추 같은 새로운 작물이 도입되고, 담배와 인삼 같은 상업 작물이 재배되고 이러면서 농업 수준이 다시 회복돼요. 처음에는 농업 수준이 전란의 여파로 한 1/3 수준으로 떨어졌다가 급격하게 회복이 됩니다. 그 과정이 나중에 영정 조기, 조선왕조의 르네상스 기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런 형태의 다시 경제 재건이 이루어지는 시기고요. 그러면서 개성이나 한양과 같은 상업도시들이 크게 성장합니다. 소위 부상 대고들이 성장을 하고, 그 사람들이 고용한 농업이나 상업 노동자 집단이 늘어나고. 그래서 서울은 처음에 인구 10만 명 남짓하게 시작되었던 인구가 한양 주변 인구까지 합쳐서 30만 이상으로 인구가 늘어나게 되고, 미곡 운송의 중심지인 용산 목재 집산지, 뚝섬, 서해에서 난 해산물 집결지 마포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포구 상업이 발전해서 경강 산업이 굉장히 발전해서 원래 삼강이었던 것이 팔 강으로까지 크게 늘어난다거나 또 성저십리, 소위 자내지역 곳곳에 그런 굉장히 상업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과거 조선 초기의 서울의 모습이 일종의 군자와 양반의 도시였다면 조선 후기에는 거의 상인과 서민의 도시로 굉장히 문화가 바뀌는 양상을 볼 수가 있고요. 그래서 유교적 가치관이 굉장히 규범이 약화되고, 신분제가 문란해지고, 그래서 사회질서가 동요하면서, 사실 조선 후기되면, 원래는 조선 초기에는 남녀 균분 상속제였는데,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상속 제도를 장자 상속 제도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조선 후기 전쟁 재건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양의 모습

이런 것들은 조선 후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농경시대에 나누어줄 토지가 점점 부족해지면서 이것을 독점하게 된 거죠. 혹은 집안에서는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이런 것들이 다 조선 후기에 나타나게 된 현상이라고 볼 수가 있고. 그러면서 권력을 독점하게 된 사람들이 점점 더 흔들리는 사회 기강을 굉장히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맞기 위해서 소중화 사상이라는 것을 앞세우고, 북벌론을 앞세우고 이러면서 과거 명나라가 몰락한 이후에 중화의 사회적인 이념을 조선이 지켜내야 된다는 그런 명분론이 굉장히 강하게 자리 잡게 되고, 이게 이어져서 나중에 결국 개항 키 서세동점의 시기조차도 척화비를 앞세워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가게 되는 굉장히 보수적인 사회 이념이 이때부터 조선의 집권층들에게 마련된다고 볼 수가 있죠. 그리고 이 시기에 사실은 굉장히 많은 사림파의 붕당정치가 토지나 관직의 제한성으로 인해서 점점 더 극단적인 권력다툼이 커지면서 그게 쇄도 정치라는 형태로 19세기에 굉장히 일부 몇몇 유력 가문들이 왕족과 혹은 자기 양반들 간 혼인 집단을 통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혼맥과 학연 등을 통해서 권력을 세습적으로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과거에는 조선왕조가 과거제도를 통해서 각 지역에서 골고루 우수한 학자들을 관료로 선발을 했다면 점점 더 과거제도보다는 음서나 대가 같은 추천제도 같은 것을 통해서 특권집단들이 권력을 세습하는 경향이 커지게 되고, 그러면서 지방 사람들은 자꾸 권력에서 배제시키고, 서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지배집단을 형성하면서 소위 경화사족이라는 서울의 특권층이 만들어지고. 서울은 그래서 과거에는 단순히 조선 치기에는 행정 정치도시였다면 여기에 경제적 부가 상업도시로 발전하면서 사치와 문화가 점점 더 서울에 집중되면서 지방과 서울의 격차가 커지고, 일종의 한양이 점차 독점적인 경제적인 부를 향우 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권력이 세습되고 거래되는 굉장히 세속적인 도시로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조선 후기의 서울 - 세속화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보면 조선 후기의 서울이라는 것은 굉장히 나쁘게 보면 도시의 타락, 세속화라고 볼 수 있고, 좋게 보면 일정 정도 자본주의적인 근대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변화들이 이루어진 시기가 전체적인 16~17세기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국제 전쟁의 결과로 동아시아 전체가 그런 변화를 맞이하게 되고, 그것이 서울의 조선 후기에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 현상이고요. 그 결과 서울 4대 문 안 지역뿐만 아니라, 자내지역이라고 불리는 성외 지역에도 경강 산업 지역은 물론이고, 그 이외 지역들도 점차 확대되어가서 오늘날 불광동, 갈현동, 홍은동, 홍제동, 송파, 잠실, 노원, 중계 이 일대까지도 서울의 상업적인 성황을 배경으로 해서 인구가 점점 더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것이 조선시대 서울의, 한양의 팽창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과정이 조선 후기의 서울의 상업화를 통한 한성부의 변화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일종의 성리학적인 왕조 수도로서 궁궐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수도로서의 역사를 기억을 하고 있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서울의 기억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변화 중에서 특정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기본적으로 서울이라는 곳이 한국의 수도로서 아직까지도 조선왕조부터 이어져온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억들을 중심으로 기억이 기념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