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대의 한성에 대한 학계의 논의

2022. 7. 27. 07:39조선, 개항기, 서울 역사, 지리

백제 시대의 한성에 대한 학계의 논의

백제 시대의 한성에 대한 학계의 논의
백제 시대의 한성에 대한 학계의 논의

그동안의 학계 논의를 정리해보면, 한성 백제 위례성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굉장히 분분했습니다.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대체로 보면 서울의 발전이라는 것이 선사시대에서 고대 중세에 이르는 과정은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강북으로 점점 이동하고 발전하는 방향이었다면, 거꾸로 조선시대 이후에 현대 서울의 발전은 강북의 지금 사대문 안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점점 강남으로 확장되어 온 과정, 역방향을 띠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현대 서울에서는 한참 뒤늦게야 오히려 고대 서울의 유적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죠. 사실 이 고대 서울의 유적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이 처음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입니다. 계기가 뭐냐 하면, 1925년에 한강에 기록적인 대홍수가 일어났는데요. 그래서 거의 사대문 안 지역도 상당 부분 물에 잠기는, 침수되는 대단한 피해가 났습니다. 그걸 우리가 을축년 대홍수라고 하는데요.

유물들의 대거 출토

이 을축년 대홍수의 결과로 사실 한강 유역, 강남 지역도 토사가 막 씻겨 내려가면서 그 밑에 묻혀 있던 유물들이 대거 출토가 된 것이죠. 사실 오늘날 선사시대의 유적지나 백제 풍납토성 유적이나 이런 것들이 다 그때 일부 출토가 되면서 근대적인 의미에서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이 됩니다. 이게 제대로 논의는 되지 못하고 계속 묻혀있다가 다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1970년 강남 개발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땅을 파니까 거기에서 백제 유적이 막 나오게 된 거죠. 그래서 이제 다시 고고학적 발굴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80년대에 특히 올림픽 준비를 하면서 지금 몽촌토성 있는 자리가 올림픽공원 자리이지 않습니까? 이 올림픽공원 조성, Sport Complex를 조성하면서 몽촌토성의 유적들이 대거 발굴이 된 것이죠. 그래서 그때부터 백제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러나 강남 개발 당시만 해도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굉장히 개발주의적인 관성이 강했기 때문에 유적을 제대로 보존하거나 연구하거나 이런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죠.

백제시대의 역사 - 위례성에 대한 논의

상당 부분 소실되고 파괴된 부분들은 굉장히 안타깝지만, 그렇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백제에 대해서 쓰인 역사서들은 그전까지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찬된 사서들인데, 가장 오래된 게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1145년에 나왔습니다. 이게 이미 백제가 망한 게 660년이니까 한 500년 이상 지난 시점에서 나왔는데, 이 책에서 이미 위례성 위치를 모른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그거보다 더 뒤인 1281년에 나온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위례성이 충청도 직산(천안)라고 또 얘기를 하고 있어요.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삼국유사」의 얘기를 믿고 직산 근처에 백제 위례성이 있었다고 생각을 해왔는데, 정약용 같은 사람은 이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바 있었고요. 그러다가 일제시기 들어서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 위례성이 한강 이남, 경기도 광주 지역, 그 당시 광주군이라고 하는 게 지금보다는 훨씬 넓은 지역을 포함하는데 이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들의 주장이었고, 해방 이후에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그 영향을 받은 바 있죠. 예를 들면 남한산성이 조선시대에 세워지기 전부터 사실 이미 백제시대부터 백제의 왕성이 아니었느냐 하는 주장도 있었고요. 그래서 송파 부근에 백제유적 발굴조사가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이고, 특히 바로 인근에 있는 석촌동 고분군에서 굉장히 많은 고분 유적들이 발굴되었는데, 그곳이 백제 왕실 묘역으로 인정이 되면서 백제가 한성 백제 시절만 해도 몇 백 년입니까? 왕 묘역만 해도 봉분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거죠. 그중에 아주 일부가 발굴된 것이 석촌동 고분군에 해당합니다. 많은 부분 이미 훼손이 된 상황이었고요. 가락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이 1970년대 잠실지구 개발사업 과정에서 어쨌든 훼손되면서도 발굴이 되면서 이게 백제 무덤이냐, 신라 무덤이냐. 부장품을 가지고 이거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고요. 또 지금도 고려왕조 남경의 궁궐이었던 연흥전의 위치가 어딘가에 대해서도 사실 제대로 된 고고학적 발굴이 없었기 때문에 사대문 안 지역에 지금 포개져 있다고 추정하고 있을 뿐이지 상당 부분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서울의 유적들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