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25. 21:05ㆍ조선, 개항기, 서울 역사, 지리
개항 이후에 서울의 변화된 모습

개항 이후에 서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을 보려면 우선 그 당시 조선 후기 혹은 조선 말기 서울의 상황이 어땠는가에 대해서 살펴봐야 되는데요. 한성부 지역은 조선 초기 유교적 신분제에 따라서 일정한 거주지의 사회적 분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게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전통 시대의 엄격한 신분제에 따른 주거 분리 현상은 아니고요. 그런 제도적인 강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생활·습속 상의 제한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거주지가 일정하게 분화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의 거주지 분화
주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 지역이 가장 노른자위 땅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왕족을 제외한 사람들이 살기에 제일 좋은 땅이었죠. 여기를 조선 후기에 주로 노론 집권층들이 여기서 모여서 살게 되고요. 그래서 북촌 일대의 효자동, 궁정동, 삼청동, 가회동, 계동, 안국동, 원서동 일대가 주로 양반 관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고 그다음에 주로 궁궐에서 일하는 기술직 관리나 아전들, 이런 사람들이 청진동 일대와 장교, 수표교 일대에 주로 살았습니다. 아무래도 관아에 출입을 자주 해야 되니까 거기에 가깝고 용이한 지역에 살았다고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잡직 종사자들, 누하동, 적선동, 사직동 이런 쪽에 모여 살았고. 대다수 농민들은, 성 바깥 지역이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내지역이라고 부르는 성저십리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여기에 모여 살았습니다.
신분 분화와 거주지 차이
지금으로 따지자면 신촌, 도화동, 제기동, 종암동 이런 지역들이 주로 농민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라고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경강상업이 조선 후기에 발전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래서 삼강에서 오강 거쳐서 팔 강까지 포구가 굉장히 확대되었다 말씀드렸는데요. 주로 객주나 경강상인, 어민들 이런 사람들은 그런 팔강, 특히 마포를 중심으로 해서 한강변에 주로 분포되어서 살았다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특수 직업군으로 기생들, 이런 사람들은 청진동, 서린동, 다동 지금으로 따지면 그런 지역에 주로 있었고 백정은 혜화동 일대에 살고 이런 형태로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신분적인 분화 혹은 직업적인 분화가 이루어져서 조선 한성 구역이 나눠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걸 아주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청계천을 경계로 해서 남쪽은 남촌, 북쪽은 북촌 이렇게 불렸는데 그렇게 봤을 때 청계천에서 북악산 사이의 북촌 지역은 비교적 양반 관료 등 권세가 있는 사람이 많이 살았고. 물론 서촌이나 혜화동이나 이런 데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중인이나 백정이나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북촌 지역은 권세 있는 사람들. 청계천에서 남산 사이에 이르는 남촌 지역은 좀 권세가 떨어지는 사람들, 미관말직이거나 권세가 없는 양반이거나 한미한 사람들이 산다고 그러죠? 그래서 흔히 그 당시에는 남산골 딸깍발이들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게 뭐냐면 남산 일대는 북향이어서 비가 오거나 이러면 물이 잘 안 마르는 거죠. 그래서 질퍽질퍽해서 짚신 신고는 그런 데 다니기 힘드니까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자로는 진흙 니(泥), 고개 현(峴) 써서 니현(泥峴)이라고 부르고 진고개라고 불렀던 그 지역이 나중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주로 많이 모여 살게 된 오늘날의 충무동 일대가 되는데요. 그 지역들이 그래서 그런 한미한 양반들이 많이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양 지형과 발달 과정
서울의 전체적인 지형을 성저십리까지 포함해서 살펴보면 대체로 남쪽이 낮고 평평한 U자형의 개방분지 형태고 그걸 둘러싸고 삼면은 산지가 분포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김정호의 지도를 보여드렸습니다만 도성 내외를 통틀어서 약 230개 이상의 크고 작은 고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평한 너른 평야지대는 분명히 아니고요. 외부 사람들이 개항기 이후에 들어오게 되면 아무래도 그 당시에 한강이 여름에 수해가 잦았기 때문에 한강유역의 저지대에는 사람들이 별로 거주하지는 않았죠. 그래서 외부 세력들이 들어왔을 때 사대문 안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은 아무래도 처음에 들어가기는 굉장히 저항이 만만치 않고 어려웠을 거고요. 그래서 주로 한강 저지대 주변에 저습지대를 둑을 쌓거나 매립을 해서 이 지역부터 정착해가기 쉬운 방식으로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죠. 크게 보면 그런 형태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조선 후기의 한성부는 지난번에 제가 정치행정도시에서 경제도시, 상업도시로 상당 부분 성격이 변했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조업이 발전한 상품 생산지라고 볼 수는 없고요. 예전이 중앙집권적인 정치력 기반해서 여러 가지 조선 8도의 물산들이 집산되는 거대한 구매력을 가진 상품 소비시장으로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죠. 한성부는 행정구역상으로는 다섯 개의 부로 구성돼 있었는데요. 가운데에 중부가 있고 그다음에 동·서·남·북부가 있습니다. 이게 사대문 안만 관할하는 것은 아니고 성저십리 자내지역까지 다 관할을 하는 형태로 행정구역이 나눠져 있었고요. 그래서 각 지역의 신분이나 직업별 구성이 나중에 1910년에 나온 통계 자료가 있는데요. 그걸 보더라도 대체로 보면 북촌 지역에 해당하는 북부 지역의 관리나 양반들이 집중돼 있고 상대적으로 상업이나 농업이나 공업 이런 것들은 성저십리 주변 지역에 많이 분포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직이 대단히 많은데요. 그건 근대적인 임의의 직종으로 분류하기 힘든 그 당시에 사실 놀고먹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고요. 관직을 가진 친척이 있으면 그 집에 얹혀사는 식객들이 굉장히 많았죠. 그게 양반집이면 당연히 그 사람들을 부양해야 되는 것이 당연한 도리고 예법으로 생각했던 부분도 있고 그게 또 조선 후기의 고관대작들로 하여금 굉장히 부패하게 만들고 관직을 가문들 간에 서로 나눠먹기 하고 독식하게끔 만들었던 사회적인 기저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개항기 때 동서남북 그리고 용산 지역들이 상공업자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화폐 경쟁이나 토지의 상업화가 상대적으로 일찍 발전한 곳이었고요. 그래서 개항기 이후에 일본인들을 비롯한 외부 세력들이 침투하기 가장 쉬웠던 곳이 용산이고 가장 어려웠던 곳이 북촌 지역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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